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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만파식적, 옥적(玉笛)

심춘 2006. 11. 20. 10:53

신라의 만파식적, 옥적(玉笛)

 

 

옥적은 실제적으로 연주되는 악기는 아니지만 고금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과 마음 속에

피어나게 하는 천상의 소리이며 피안에서 행복과 평안을 갈구하며

영원히 울려 퍼질 옥소리인 것이다.

 

 

주재근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 

 

국립국악원 소장 옥적(玉笛)                                        

 

 

마전 신문을 훑어보니 미국의 매사추세츠주 세일럼(Salem)시에 위치한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The Peabody Essex Museum)에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자인 유길준 선생의 전시실을 개관하였다는 기사를 접하였다. 

한국인의 이름을 앞세운 전시실이 외국의 유명한 박물관에 처음으로 신설되었다는 것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며 고무되고 있었다. 

그러나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과 우리와의 인연은 훨씬 오래 전에 우리나라의 여러 악기를 보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즉, 1893년 시카고 박람회때 출품된 향피리나 대금, 생황, 옥적, 해금, 양금, 비파등의 악기와 이후 1927년에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이 매입한 여러 악기들을 소장하고 있다. 

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악기 가운데 옥적(玉笛)이 있어 주목을 끄는데 옥적은 옥(玉)으로 만든 대금모양의 관악기로서 실제 연주용으로 제작되었다기 보다는 신성스러운 악기(神器)나 개인의 애장품으로 소중하게 간직해 오고 있는 것이다. 

옥적은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 이외에 국립국악원을 비롯하여 국립경주박물관, 옥산서원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여러 개인에게도 간직되어 오고 있다.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있는 옥적은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가 불분명하며 또한 소장 연유도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입술을 대어 소리내는 취구(吹口)와 갈대청을 붙여 대금만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청공(淸孔), 그리고 6개의 지공(指孔), 한 개의 칠성공(七星孔)이 있어 오늘날의 대금과 완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옥적은 보다 맑고 깨끗한 소리

대금 소리와 비교하기 위해 소리를 내어 보았는데 대금이 부드러우며 약간 거친 느낌이었다면 옥적은 보다 맑고 깨끗한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할지언정 연주용으로는 옥적 보다 대금이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옥적은 그 내면에 상징하고 있는 의미망이 전연 다르다. 

즉, 옥은 지극히 높으며 견줄 데 없이 뛰어난 것으로서 양(陽), 천(天), 부(父)의 원리(乾)라고 한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옥은 저절로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고 광택이 나기 때문에 인(仁)을 나타내고 섬세함과 견고함으로는 지(知)를 나타내며 모가 나 있지만 날카롭거나 사물에 상처를 입히지 않아 의(義)를 나타내며 몸에 옥구슬을 꿰어서 아래로 늘어뜨리는 것은 예(禮)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발현된 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설화일 것으로 본다.  

그 내용은 신문왕(681~692)이 해안을 거닐 때 동해의 용왕이 나타나 ‘성왕은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상서이니 이 대를 취하여 젓대를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 하여 이상한 대나무를 헌상하여 적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만파식적이라고 칭하고 월성 천존고에 국보로 보존하였다는 기록이다. 

오늘날 대금(大?)의 연원을 위의 만파식적의 설화에 근거하고 있는데 내용으로 보아서는 오늘날 전하는 옥적(玉笛)에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경주에 옥저가 있는데 길이가 1자 9치인데, 그 성음이 청량하며, 속전에 이것은 동해의 용왕이 바친 것으로서 역대의 보물로서 전한다’라는 기록과 연산군(燕山君) 10년 7월 28일 ‘경주 옥저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 경주지방에 신라시대 이후 옥저가 보관되어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옥적의 설명문을 보면 ‘신라시대 이후 역대로 국보로 보존되어 오다가 잠시 유실되었는데, 숙종 31년 김승학이란 사람이 객관 흙담에서 이를 발견하고 경주 부윤 이인징에게 보내 관아에 보존해 왔고 한 때 창경궁에 진열한 적도 있다’라고 한다. 이 옥저는 검은 점이 많은 황옥(黃玉)으로 만들었고, 길이는 한자 여덟 치, 칠성공은 네 개가 뚫려 있는 것이다. 

또한, 충남 온양에 고불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유물로서 옥적(충남중요민속자료 제225호)이 있는데 일제 강점기 때 네 도막으로 부러져 백동관으로 감싸서 수리하였다고 한다. 

 

 

 

왕이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하사한 옥적

예전에는 국가에 큰 공을 세우거나 업적을 남기게 되면 이를 치하하기 위하여 왕이 여러 가지 귀중한 선물을 하는데 그 중에 옥적을 하사하였음을 볼 수 있다. 즉, 장말손(張末孫, 1431~1486)이라는 장군은 조선 세조12년(1466)에 함경도 회령에서 야인을 물리친 공을 세워 옥적을 하사 받았다고 하며 배삼익(裵三益, 1534~1588)은 중국 명나라 신종(神宗)으로부터 옥적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이언적(李彦迪, 1491~1553)선생의 유덕이 서린 경주 부근의 옥산서원(玉山書院)에도 옥적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서로운 신기로서 옥적(玉笛)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물을 생동케 하는 아름다운 소리를 간직한 옥적

지난 1998년에는 서울 운현궁 미술관에서 열리는 제9회 미술품 경매전에 옥적 2개가 선보여 관심을 모았다. 

소장가인 최주호(崔柱昊.74.전 언론인) 씨에 따르면 "1979년께 경주에서 동경보광당을 경영하는 이종률 (李鍾律.작고) 씨로부터 인수한 것인데 원 소장가는 1910년대 초대 경주박물관장을 지냈던 모로시카 오유 (諸鹿央雄) 였다"라고 한다. 

신라시대 이후 만파식적의 설화로만 남겨져 있지 않고 모든 근심 걱정을 흩날려 버리고 만물을 생동케 하는 아름다운 소리를 간직한 옥적은 이렇게 잊혀질만 하면 우리를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한다. 

옥적은 실제적으로 연주되는 악기는 아니지만 고금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과 마음 속에 피어나게 하는 천상의 소리이며 피안에서 행복과 평안을 갈구하며 영원히 울려 퍼질 옥소리인 것이다. 

요즈음과 같은 가을 아침에 청신한 공기에 젖어 마음 속에서 울려 퍼지는 옥피리(玉笛)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자.       

 

 

 

옥적(玉笛)

 

김상옥 作 (1947년)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축이시며,

뚫린 구멍마다 임의 손이 움직일 때,

그 소리 은하(銀河) 흐르듯 서라벌에 퍼지다.

 

 

끝없이 맑은 소리 천 년을 머금은 채,

따스히 서린 입김 상기도 남았거니,

차라리 외로울망정 뜻을 달리 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