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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

심춘 2008. 8. 28. 10:25

<제로존>은 이 세계의 아름다운 화원의 비밀'비례'에 있다고 제로존 이론의 공준에서 침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화원의 비밀이 바로 기표와 기의의 바(bar, /)에 존재하는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의 새로운 기표는 제로존 이론에서는

 

바로 허수( i )’로 설명합니다. 무기표적인 침묵의

 

주체가 허수가 되는 것입니다 !

 

꿈의 분석에서 나온 무의식의 정체가 제로존 이론에서는 허수로 설명합니다. 이 허수가 실수가 되는 과정이 바로 무의식이 의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으로 묘사하거나 전사(傳寫)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허수는 가능성이 아니라 잠재성입니다. 물리학 수식에 자주 등장하는 허수는 그 잠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과론 적으로는 확률적인 묘상으로 드러납니다.

 

잠재성은 어느 한 찰라라도 배치에 따라 현재화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잠재성과 가능성의 개념은 시공간적으로 긴장상태에 있습니다. (이 부분의 설명도 다시 보강 할 것입니다)

 

이 허수가 바로 내 안의 타자, 곧 마음의 본질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순수한 흐름입니다 !

 

이 허수가 이 세상의 표현층에 나타나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중성의 실체가 된 것입니다. 물을 흡수하는 방습제는 결코 건조 할 수가 없습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과학적 명제의 기표로서 자신은 크기를 가지지 않으면서 크기를 만들어 주는 ‘1’입니다. 그래서 제로존은 ‘1’을 크기자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은 방향을 가지지 않으면서 방향을 만들어 주는 것은 ‘0’입니다. 그래서 제로존은 ‘0’을 방향자라고 한 것입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수학의 실체로서 허수가 꾸미는 연극의 무대에 ‘1’‘0’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연극 무대에 주인공이 다시 ‘1’‘0’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전자의 ‘1’‘0’은 내 안의 타자로서 들어앉아 있는 것이며, 이들은 크기를 비교할 수 없는 허수의 묘상입니다. 곧 무의식의 본질이지요. 내 안의 나는 ‘0’  ‘1’입니다. 이제 이 둘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의식의 자로, 바로 크기를 가진 인식의 자요, 측정의 자입니다.

 

이제 0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공집합으로 표현하고, ‘1’은 모든 것을 만들어 주는 기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로존 이론은 모든 것이 쉽게 이야기 해서 1에서 나왔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무의식의 허수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제 모든 것은 무한한 실수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시공간도 하나, 무의식도 하나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이 시공간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으며, 무의식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그러고 보니 이 눔, 저 눔, 그 눔들이 다 그 눔들이군요~!  눔을 '아이'로 바꾸면 재미납니다.

 

길가의 풀도,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돌멩이도, 흐르는 물도 시공간을 가지고 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고유한 자기만의 숫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유한 주파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실체는 하나에서 나오면서 서로 고유한 주파수들을 교환하고 있습니다. 결합 관계와 계열 관계로 엮어진 문장이 바로 하나의 기호가 되는 것입니다.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허수의 세계가 기표가 되면서 존재의 세계가 되고, 이 허수의 기표가 실수로 되는 순간 표현의 세계가 됩니다. 표상의 층에서는 허수와 실수 사이에 내 안의 들어앉아 있는 나가 조정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쭈그리고 앉아있는 눈치의 도사로서 조정자는 어느 순간 허수가 되었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실수가 됩니다. 이 눈치도사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저서에는 가끔 언표의 주체와 언표의 행위 주체로 해석되어 '고아'가 되고 있습니다. 수천, 수만의 고원에 존재하고 있는 고독한 존재자 입니다.

 

이제 그러고 보니 이 세상 모든 것은 기호체계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고유한 마음, 곧 고유한 주파수를 가져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숫자는 빛이며, 바로 에너지입니다. 지구와 달과 태양이 아무리 큰 세계의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이 내포한 무한한 마음의 세계에서 보면 티끌 같은 점이라기 보다 도 하나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마음을 먹으면(내 안의 너, 아이와 주파

 

수를맞추어) 온 세상 모든 것에 내마음이 전해집니

 

.

 

모든 것이 숫자요, 빛이며, 에너지가 아닌 것이 없

 

습니다 ! 

 

비슷한 것은 서로 끌어 당기는 것이 바로 공명의 기전입니다. 

 

음악에서 모든 주파수의 소리를 음악적인 소리로 사용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종합 하는 자를 뜻하는 신디사이저(synthesizer)는 서로 다른 주파수의 소리를 섞어서 새로운 소리를 무한히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는 이전에 없던 소리까지도 만들어 내게 되어 음악적 소리의 표현영역이 원리상으로는 무한히 확장되는 결과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일정한 형식을 고집하던 화성학을 음향학이 대신하게 되고 주파수 변조(frequency modulation)가 작곡의 일반적인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음고, 지속, 강밀도, 음색, 발성 등 모든 소리의 구성요소에 대해 지금까지의 규칙을 파괴합니다. 그리하여 질료를 조직해 내는 하나의 음향적 형식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며, 음악적 형식의 연속적 발전에 대해서 말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음악에서 음성은 언어와 소리에 동시에 작용하면서 실험의 특권적 축이 되어 왔는데 이제 음악과 언어의 경계는 무너지고 하나의 음향적 연속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언어가 비의미화 되면서 특정한 음색의 소리로 내는 것은 기표와 무관하고, 언어 외적인 것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하나의 언어, 아니 이처럼 수많은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숫자 안에서 어떤 숫자를 만들어 내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프루스트>의 말대로 걸작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언어, 곧 딱딱한 학술적 언어를 사용하면서 보통 일상적인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블로그에서는 신세대의 이상한 말들을 쓰기도 합니다. 한글과 한자, 그리고 영어 게다가 은밀스런 채팅언어도 씁니다. 모든 격식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리 한글은 그래서 참 좋습니다.

 

苦見諸相非相 卽見如來(고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모든 상() 있는 것에서 상 없는 것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

 

모든 상 있는 곳에서 상 없는 것을 본 '아이'가 실제로 있습니다.

 

깊은 야밤, 어떤 도둑 눔이 뭘 훔치려고 가정집에 들어 왔는데, 훔칠 물건이 없어요, 그래서 화가 잔뜩 난 도둑 눔은 혼자 자는 아이를 깨웠다. 괜한 심통이 났던지 그 도둑 눔은 아이의 배에 칼을 들이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퀴즈를 하나 낼 텐데 답을 맞춰봐! 삼국시대 나라 이름을 모두대봐~!”

 

그러자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

 

배째 실려 고 구려~?”

 

도둑 눔은 맞았다 맞았어 하면서 웃고 기냥 나갔다나?   

 

하 하 하 ~!

 

그 아이가 상 있는 곳에서 상 없는 것을 본 참 똑똑한 아이로 그이름이 ~ ‘’ ~ 라고 했던가?

 

 

내 안에 있는 너는 바로 우리들의 친숙한 '아이' 였

 

습니다 ~!